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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얄 카파디아의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 - 뭄바이 여성들의 고독과 연대를 그린 시적 걸작

책이랑 영화랑 2025. 5. 26. 09:39

2024년 칸영화제 심사위원 대상 수상작, 30년 만에 칸 경쟁부문에 초청된 인도 영화

영화 포스터

들어가며: 발리우드를 넘어선 진짜 인도 영화

영화를 보고 나서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었다. 화려한 군무도, 극적인 반전도 없는 이 영화가 왜 이렇게 깊은 여운을 남기는 걸까? 파얄 카파디아 감독의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All We Imagine as Light)'은 우리가 흔히 아는 발리우드 영화와는 완전히 다른, 진짜 인도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 영화는 2024년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수상하며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특히 샤지 카룬 감독의 '스와함' 이후 30년 만에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된 인도 영화라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깊다.

뭄바이에서 꿈꾸는 세 여성의 이야기

뭄바이 병원에서 일하는 간호사들

 

영화는 인도 뭄바이의 한 병원에서 일하는 세 명의 여성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프라바(카니 쿠스루티)는 독일로 떠난 남편과 연락이 끊긴 채 홀로 지내는 간호사다. 어느 날 남편이 보낸 전기밥솥이 도착하면서 그녀의 일상에 작은 파문이 일어난다.

아누(디브야 프라바)는 프라바의 동료이자 룸메이트로, 힌두교도이지만 무슬림 남성 시아즈와 비밀 연애를 하고 있다. 종교적 차이로 인해 둘의 사랑은 숨어서 이뤄져야 한다.

파르바티(차야 카담)는 병원 요리사로 일하는 중년 여성이다. 30년 넘게 살아온 집이 재개발로 철거될 위기에 처해 있지만, 거주 증명 서류가 없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사랑을 나누어야 하는 딱한 처지"

감독의 독특한 연출: 다큐멘터리와 픽션의 경계

논픽션적 접근의 픽션

파얄 카파디아 감독은 다큐멘터리 감독 출신답게 "논픽션의 방식으로 픽션에 접근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영화 초반 뭄바이의 일상을 담은 시퀀스는 실제 푸티지(영화나 영상 제작 과정에서 녹화된 원본 비디오 자료)와 재구성된 내레이션이 절묘하게 결합된 결과물이다.

뭄바이 새벽 풍경

 

특히 영상과 무관한 사운드를 의도적으로 중첩시키거나, 연관 없어 보이는 이미지들을 나열하여 새로운 맥락을 만들어내는 감독의 기법은 관객으로 하여금 스스로 이야기를 완성하도록 유도한다.

빛과 어둠의 상징적 활용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빛과 어둠의 활용이다. 뭄바이의 장면들은 대부분 밤에 촬영되었는데, 도시의 인공 불빛 아래서 주인공들은 낮 동안 노동으로 빼앗긴 시간 대신 자신만의 시간을 찾는다.

 

반면 영화 후반부 세 여성이 함께 떠나는 바닷가 마을 라트나기리는 따뜻한 자연의 빛으로 가득하다. 이곳에서 인물들은 뭄바이에서는 상상할 수 없었던 자유와 위로를 경험한다.

현대 인도 사회의 단면들

이주 여성 노동자들의 현실

영화는 꿈을 찾아 대도시로 몰려든 이주 여성들의 현실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뭄바이는 '꿈의 도시'라 불리지만, 실제로는 자본도 계급도 심지어 사랑할 자유조차 보장해주지 않는 곳이다.

프라바의 고독, 아누의 제약된 사랑, 파르바티의 주거불안정은 모두 개인적인 문제인 동시에 인도 사회의 구조적 문제와 맞닿아 있다.

종교적 갈등과 사회적 제약

아누와 시아즈의 관계는 인도 사회에 뿌리 깊게 남아있는 종교적 갈등을 보여준다. 힌두교도와 무슬림의 연애는 여전히 사회적 금기로 여겨지며, 이들은 타인의 시선을 피해 숨어서 만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왜 이렇게 숨어서 만나야 하는 거지?"

젠트리피케이션과 주거권 문제

파르바티의 이야기는 급속한 도시화 과정에서 소외되는 서민들의 현실을 드러낸다. 30년 넘게 살아온 집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한 그녀의 상황은 뭄바이뿐만 아니라 전 세계 대도시가 공통으로 겪고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여성 연대의 힘: 함께라서 견딜 수 있는 것들

 

영화의 백미는 세 여성이 함께 떠나는 라트나기리 여행이다. 파르바티의 주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작된 여행이지만, 이 과정에서 세 사람은 서로에 대해 더 깊이 알게 되고 진정한 연대를 형성한다.

파얄 카파디아 감독은 "인도에서는 특히 가부장제가 여성들의 우정을 방해한다"며, "가부장제가 끝났을 때 두 여성이 강하게 연대하는 모습이 희망적으로 다가오기를 바랐다"고 말했다.

실제로 해변 마을에서의 시간은 세 여성 각자에게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다. 아누는 시아즈와 자유롭게 사랑을 나누고, 프라바는 바다에서 구조한 낯선 남자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과 남편의 관계를 되돌아본다.

'빛'의 의미: 상상하는 힘

 

영화 제목인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에서 핵심은 '빛'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상상하는' 행위다. 현실이 아무리 어둡고 절망적이어도, 빛을 상상할 수 있다면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해변가 작은 가게에서 나오는 희미한 빛은 '빛'이라 부르기엔 너무 연약하다. 하지만 이 깜깜한 어둠 안에도 여전히 서로를 사랑하고 응원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희망이다.

 "어둠 속에서도 우리는 서로의 빛이 될 수 있어"

연기와 연출의 조화

자연스러운 연기력

세 주연 배우의 연기는 놀라울 정도로 자연스럽다. 특히 프라바 역의 카니 쿠스루티는 대사 없이도 표정과 몸짓만으로 깊은 고독감을 전달한다. 흥미롭게도 그녀는 원래 아누 역으로 캐스팅되었다가 8년 후 프라바 역으로 출연하게 되었다고 한다.

몰입도 높은 영상미

영화의 영상미는 완벽하게 매끈하지는 않지만, 오히려 그 흐릿함이 도시의 애상과 잘 어울린다. 프라바가 땀을 흘리는 모습, 선풍기 소리, 습기찬 공기까지도 뭄바이의 촉감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아쉬운 점과 한계

완벽해 보이는 이 영화에도 아쉬운 부분은 있다. 간혹 지나치게 시적인 연출로 인해 서사의 흐름이 늘어지는 순간들이 있고, 인도 사회에 대한 배경지식이 부족한 관객에게는 일부 상황의 심각성이 충분히 전달되지 않을 수 있다.

또한 남성 인물들의 묘사가 상대적으로 평면적이라는 점도 아쉽다. 여성 중심의 이야기라는 한계 내에서도 좀 더 입체적인 남성 캐릭터가 등장했다면 더욱 풍성한 이야기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마치며: 우리 모두의 이야기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은 인도 뭄바이의 특수한 상황을 다루고 있지만, 결국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이야기다. 대도시의 고독, 꿈과 현실의 괴리, 사회적 제약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희망과 연대의 가능성은 국경을 초월하는 보편적 주제다.

파얄 카파디아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도 서로가 서로의 빛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 빛이 아무리 희미하더라도, 상상할 수 있다면 우리는 계속 살아갈 수 있다.

영화를 보고 나서 문득 생각했다. 내 삶에서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은 무엇일까? 그리고 나는 누군가에게 빛이 되어주고 있을까? 이런 질문을 던지게 하는 것이야말로 이 영화의 가장 큰 힘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