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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원더풀 라이프': 당신은 어떤 기억을 선택하겠습니까?

책이랑 영화랑 2025. 5. 30. 10:58

포스터

만남: 기억의 미학에 사로잡히다

비 내리는 어느 저녁, 빗소리와 까만 밤을 즐기면서 삶을 되돌아 보기 딱 좋은 시간에 내 취향 잘 맞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원더풀 라이프'(After Life, 1998)를 다시 보았다. 일본 영화계의 거장이 만든 이 작품은 현실과 환상, 기억과 망각, 삶과 죽음의 경계를 섬세하게 넘나드는 보석 같은 영화다. 사람들이 죽은 후 '림보'라는 중간역에서 일주일간 단 하나의 기억을 선택해 영원히 간직한다는 설정은 단순하지만, 그 안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그 어떤 화려한 판타지보다 깊은 울림을 준다.

중간역 림보에 도착한 사람들

영화의 세계로: 죽음 이후의 일주일 

'원더풀 라이프'는 사람들이 죽은 후 도착하는 '림보'라는 공간에서 펼쳐진다. 이곳은 천국으로 가기 전 일주일간 머무는 중간역으로, 죽은 사람들은 이곳에서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기억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림보의 직원들은 선택된 기억을 짧은 영화로 재현해 주고, 망자들은 그 기억만을 간직한 채 다음 세계로 떠난다.

"천국으로 가기 전 머무는 중간역 림보. 세상을 떠난 사람들은 이곳에 7일간 머물며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기억 하나를 골라야 한다. 림보의 직원들은 그 추억을 짧은 영화로 재현해 그들을 영원으로 인도하는데... 영원히 머물고픈 순간, 당신 인생엔 있습니까?"

 

영화는 이런 설정을 바탕으로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그려낸다. 특히 주목할 만한 인물은 림보의 직원 모치즈키와 새로 도착한 망자 와타나베다. 모치즈키는 림보에서 50년간 일해온 직원으로, 자신은 아직 기억을 선택하지 못했다. 와타나베는 평범한 삶을 살아온 회사원으로, 자신의 기억 중에서 무엇이 가장 소중한지 고민한다.

영화는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기억의 본질, 삶의 의미, 선택의 무게에 대한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기억의 주관성과 예술적 재구성

'원더풀 라이프'가 특별한 이유는 기억을 다루는 방식에 있다. 영화는 기억이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재구성되는 주관적인 경험임을 보여준다.

"기억은 기록과 달라요."

 

림보 직원들이 선택된 기억을 영화로 재현하는 과정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들은 제한된 예산과 시간 속에서 소품을 준비하고 세트를 만들며, 가끔은 원래 기억과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연출을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객관적 사실보다 그 기억이 주는 감정과 의미다.

림보 직원들이 구름을 표현하기 위해 면 솜을 사용하는 장면

 

이는 고레에다 감독의 다큐멘터리 경험이 녹아든 부분이기도 하다. 그는 실제로 500여 명의 일반인에게 '당신의 가장 소중한 기억은 무엇인가요?'라고 물었고, 그 대답 중 일부를 영화에 직접 담았다. 전문 배우와 일반인의 인터뷰를 교차시키는 방식은 현실과 픽션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며 영화에 독특한 깊이를 더한다.

소소한 순간의 위대함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기억의 본질이다. 대부분은 거창하거나 드라마틱한 순간이 아니라 지극히 일상적이고 소소한 순간들이다.

  •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귀 파주는 걸 즐기던 순간
  • 비행기에서 구름 위를 날던 경험
  • 가을 햇살 아래 한가로이 전차를 타던 날
  • 딸의 결혼식에서 느낀 행복
  • 아내와 함께 처음 영화관에 갔던 날

 

이런 선택들은 진정한 행복이 거창한 성취나 극적인 순간보다는 일상의 소소한 따뜻함 속에 있음을 보여준다. 와타나베는 결국 "특별한 것 없는" 자신의 평범한 삶을 받아들이고, 아내와 함께 영화관에 갔던 날을 선택한다. 이는 삶의 의미가 화려한 경험보다는 함께 나눈 소소한 순간들에 있다는 고레에다 감독의 메시지처럼 느껴진다.

관계와 책임: 기억되는 삶의 의미

'원더풀 라이프'는 단순히 기억 선택의 이야기를 넘어, 우리가 타인과 맺는 관계와 그 안에서의 책임에 대해 이야기한다. 모치즈키는 와타나베의 비디오를 통해 자신의 옛 약혼녀 쿄코가 자신과의 추억을 영원의 기억으로 선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50년이 지나서 내가 누군가의 행복이었다는 사실을 알았어. 정말 멋진 일이야."

 

이 깨달음은 모치즈키에게 큰 충격과 함께 위안을 준다. 그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중요한 사람이었음을,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귀중한 의미인지를 비로소 깨닫는다. 이는 우리의 삶이 단절된 개인적 경험이 아니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찾는다는 중요한 통찰을 제시한다.

또한 림보에 남아 직원으로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선택과 책임에 대한 다른 관점을 보여준다. 이세야는 "선택하지 않는 것도 인생에 책임을 지는 방식"이라고 말하며, 시오리는 모치즈키를 잊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선택을 미룬다. 이들의 선택은 때로는 망각보다 기억하는 것, 그리고 그 기억에 대한 책임이 더 중요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 세계 속에서

'원더풀 라이프'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두 번째 장편 극영화로,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다큐멘터리 감독 출신인 그는 자신의 배경을 살려 픽션과 다큐멘터리의 경계를 넘나드는 독특한 스타일을 구축했다.

 

이 영화는 그의 유일한 판타지 영화이면서도, 그의 다른 작품들('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어느 가족', '바닷마을 다이어리')에서 볼 수 있는 가족, 기억, 관계에 대한 관심이 이미 담겨 있다. 특히 삶의 소소한 순간들에 대한 애정과 인간 관계에 대한 섬세한 관찰은 고레에다 감독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 있다.

또한 '원더풀 라이프'는 '영화에 관한 영화'로서의 성격도 지닌다. 림보에서 기억을 영화로 재현하는 과정은 고레에다 감독 자신의 영화 제작에 대한 고민과 애정이 담긴 메타 영화적 특성을 가진다. 기억을 재현하는 방식이 객관적인 기록이 아닌 주관적인 해석에 의존한다는 설정은 영화가 현실을 어떻게 재구성하고 해석하는지에 대한 성찰을 담고 있다.

일본적 사생관(死生觀)과 문화적 맥락

'원더풀 라이프'는 일본의 문화적 맥락에서도 흥미로운 작품이다. 영화의 림보 설정은 불교의 윤회 사상을 연상시킨다. 특히 림보의 상징인 두 개의 고리가 연결된 깃발은 삶과 죽음이 단절이 아닌 연결된 순환으로 바라보는 일본적 사생관을 암시한다.

림보의 깃발

 

또한 영화에는 관동대지진 당시의 기억을 가진 인물이 등장하는데, 이는 일본의 역사적 사건을 다루면서도 그 속에서 개인의 기억과 경험에 초점을 맞추는 고레에다 감독의 섬세한 접근을 보여준다. 일부 비평가들은 이 장면이 당시 한국인 학살 누명 문제를 염두에 둔 것이라는 해석을 제시하기도 한다.

한국 관객들에게 이 영화는 '신과 함께'나 '코코'와 같은 사후 세계를 다룬 작품들과 비교되기도 하지만, 고레에다 감독 특유의 인간적이고 소박한 시선은 판타지 설정 속에서도 독특한 감성을 전달한다.

내 삶의 기억 속으로: 개인적 감상

처음 이 영화를 보았을 때, 나는 자연스럽게 "내가 선택할 기억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답을 찾기 어려웠다. 화려하고 극적인 순간들보다 일상의 소소한 순간들이 더 마음에 와닿았지만, 그 중에서도 단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졌다.

시오리가 달을 보고 있다.

 

특히 인상적인 장면은 가짜 달을 바라보며 시오리가 말하는 대사다: "누구에게나 달은 달이지만,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느껴져요." 이는 기억의 주관성뿐만 아니라 영화라는 매체 자체에 대한 메타포로도 읽힌다. 우리는 같은 영화를 보더라도 각자의 경험과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를 발견한다.

 

가장 마음에 남는 것은 모치즈키가 자신이 누군가의 소중한 기억이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의 표정이다. 그 순간 그의 얼굴에 스치는 감정들—놀라움, 감동, 위안—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깊이가 있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살아간다. 그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위로가 되는 진실인지, 이 영화는 조용히 일깨워준다.

당신의 선택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원더풀 라이프'는 화려한 특수효과나 극적인 전개 없이도 깊은 울림을 주는 작품이다. 다큐멘터리와 픽션의 경계를 넘나드는 독특한 스타일, 소소한 일상의 가치를 발견하는 따뜻한 시선, 그리고 기억과 관계에 대한 통찰은 이 영화를 단순한 판타지가 아닌 삶에 대한 깊은 성찰로 만든다.

영화의 마지막에 림보를 떠나는 사람들의 표정은 평화롭다. 그들은 자신이 선택한 단 하나의 기억과 함께 다음 세계로 향한다. 그것이 어떤 세계인지 영화는 말해주지 않지만, 중요한 것은 그 선택의 과정 자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무엇이 진정으로 소중했는지 깨닫게 된다.

 

당신이라면 어떤 기억을 선택하겠습니까? 이 질문이 바로 '원더풀 라이프'가 관객에게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일 것이다. 코멘트를 통해 여러분의 생각을 나눠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