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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적 온기와 역사적 시선이 흐르는 공간 - 김금희의 『대온실 수리 보고서』

책이랑 영화랑 2025. 5. 8. 22:26

 

김금희 작가의 『대온실 수리 보고서』는 단순한 건축물의 수리가 아닌, 잊혀진 역사와 기억의 복원을 시도하는 작품이다.

복합적 공간으로서의 대온실

김금희의 『대온실 수리 보고서』는 우리 문학에서 드물게 건축물을 주요 매개체로 삼아 역사와 기억의 문제를 탐구하는 작품이다. 창경궁의 대온실이라는 공간은 단순한 배경이 아닌, 시간의 켜를 간직한 상징적 존재로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 1909년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이 건축물은 제국주의의 흔적이자 식민지 시대의 상흔을 품고 있지만, 동시에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여러 세대의 기억과 삶을 담아온 그릇이기도 하다.

작품은 역설적으로 이 '일제 잔재'를 통해 우리 역사의 복잡성을 직시하고, 단순한 흑백 논리가 아닌 다층적 이해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대온실은 식민지배의 상징이지만, 동시에 시미즈 마리코(안문자)와 같은 개인의 아픔과 기억이 서려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러한 공간의 양가성을 통해 역사 인식의 지평을 확장시키며, 편향된 시각 대신 다양한 목소리에 귀 기울일 것을 제안한다.

세 여성의 교차하는 내적 풍경

김금희 작가는 시대와 국적을 달리하는 세 여성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일제강점기 시미즈 마리코(후에 안문자가 됨), 현재의 작가 강영두, 그리고 영두 친구의 딸 사나는 각기 다른 시간과 상황 속에서 상처를 안고 살아가지만, 대온실이라는 공간을 매개로 서로의 아픔에 공명한다.

특히 주목할 만한 점은 김금희 작가가 이들의 내면을 그려내는 방식이다. 작가는 거창한 수사나 과장된 감정 표현 대신, 일상의 언어와 담백한 문체로 인물들의 깊은 내적 풍경을 포착해낸다. 이러한 절제된 문체는 오히려 인물들의 감정과 기억에 더 깊은 무게감을 부여한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김금희의 작품이 "삶의 무거움을 견디는 인물들의 내면을 섬세하게 포착해내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평했는데, 『대온실 수리 보고서』에서도 이러한 특징이 두드러진다. 영두가 원서동 낙원 하숙에서 겪은 어린 시절의 상처와 안문자 할머니(시미즈 마리코)의 6.25 전쟁 당시 대온실 지하 배양실에서의 기억은 과장 없이 그려지지만, 그렇기에 더욱 독자의 마음을 울린다.

역사 인식의 확장과 소외된 목소리의 복원

『대온실 수리 보고서』가 문학적으로 주목받는 이유 중 하나는 역사의 주변부에 있던 존재들의 이야기를 복원해내는 작업이라는 점이다. 김금희 작가는 한국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역사의 중심에서 벗어난 개인들의 삶과 기억에 초점을 맞춘다.

시미즈 마리코라는 일본인 소녀가 해방 후 한국에 남아 안문자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과정, 6.25 전쟁 속에서 생존을 위해 대온실 지하 배양실에 숨어 지내던 기억, 그리고 그 과정에서 겪은 상처와 아픔은 기존의 역사 서술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이야기다. 작가는 이러한 '역사의 틈새'에 있는 인물들의 목소리를 복원함으로써, 역사 인식의 지평을 확장시킨다.

이는 문학평론가 백지은이 지적한 "김금희 소설이 지닌 중요한 미덕은 역사적 비극을 개인의 삶 속에서 재구성하면서도 공적 기억과 사적 기억 사이의 긴장을 놓치지 않는 균형감"이라는 평가와 맞닿아 있다. 대온실이라는 공간은 공적 역사와 사적 기억이 교차하는 지점이며, 작가는 이를 통해 역사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을 제시한다.

치유와 공감의 가능성

『대온실 수리 보고서』가 단순한 역사 소설이 아닌 깊은 울림을 주는 작품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치유'와 '공감'이라는 인간 보편의 주제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은 대온실 수리라는 표면적 사건을 통해 역사적 상처와 개인적 트라우마의 치유 가능성을 모색한다.

주인공 영두는 대온실 수리 과정을 기록하는 작업을 통해 자신의 어린 시절 상처와 마주하게 되고, 시미즈 마리코(안문자)의 삶을 복원해내는 과정에서 자신의 아픔을 이해하고 극복해나간다. 이러한 서사 구조는 김금희 작가가 일관되게 추구해온 '삶의 상처와 회복'이라는 주제의 연장선상에 있다.

특히 작품 말미에 등장하는 "너무 마음 아파하면 어 외면하게 되어 버릴지도 모르니까 우리 너무에는 좀 조심하자"라는 문장은 상처를 직시하되 그것에 압도되지 않고 삶을 지속하는 균형의 중요성을 시사한다. 이는 김금희 문학이 추구하는 치유의 방식이기도 하다.

문학적 성취와 한계

『대온실 수리 보고서』는 김금희 작가의 문학적 역량이 더욱 성숙하게 발휘된 작품이라 평가할 수 있다. 세밀한 고증을 바탕으로 한 역사적 배경, 입체적인 인물 묘사, 그리고 시간과 공간을 넘나드는 서사 구조는 작가의 확장된 문학적 시야를 보여준다.

특히 소설 말미에 첨부된 8페이지에 달하는 참고 문헌 목록은 작가가 이 작품을 위해 얼마나 방대한 자료 조사와 연구를 진행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이는 소설이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하되, 그것을 문학적으로 재구성해내는 균형 잡힌 시도라는 점을 입증한다.

다만, 일부 비평가들은 작품이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아픔을 다루면서 제국-식민지의 권력 관계보다는 개인의 서사에 더 무게를 두는 접근 방식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역설적으로 역사 인식의 다양성을 촉발하는 지점이기도 하며, 문학이 역사와 만날 때 발생하는 생산적 긴장을 보여준다.

결론: 기억의 건축술

『대온실 수리 보고서』는 김금희 작가가 오랜 시간 천착해온 '기억'과 '서사'의 문제를 건축물이라는 특별한 매개체를 통해 확장시킨 작품이다. 대온실 수리가 오래된 건축물을 복원하는 작업이듯, 소설은 잊혀진 역사와 개인의 기억을 복원해내는 문학적 시도다.

작가는 소설의 마지막에 "나는 이 건축물과 함께 그 시절 존재들이 모두 정당히 기억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더 나아가 당신에게 이해되기를"이라는 문장을 남긴다. 이는 역사와 기억을 대하는 작가의 태도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문장이다. 단순한 기억의 복원을 넘어 '이해'라는 더 깊은 차원의 공감을 지향하는 문학적 지점이 『대온실 수리 보고서』의 가장 큰 미덕이라 할 수 있다.

김금희의 『대온실 수리 보고서』는 한국 현대문학이 역사와 기억, 개인과 사회의 문제를 어떻게 섬세하게 다룰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수작이다. 100년이 넘는 세월을 견뎌온 대온실처럼, 이 소설 역시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그 문학적 가치를 잃지 않을 것이다.

 

✨ 책을 읽는 내내 행복했습니다.

P. 17
돌아보면 항상 어떤 장소를 지워버림으로써 삶을 견뎌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잊어야겠다 싶은 장소들은 아예 발길을 끊어서 최대한 망각할 수 있게 노력해왔지만 이 일을 맡으면 그곳에 대해 생각하고 더 알게 될 것이었다. 거기에는 일년 남짓의 내 임시 일자리가 있었고 600년 전에 건축된 고궁이 있었고 잊지 않으면 살 수가 없겠구나 싶어 망각을 결심한 낙원하숙이 있었다.

P. 33
“대온실이 국가등록문화재이긴 한데 좋은 마음으로 안 보게 되잖아요. 일제 잔재라고. 창경궁 복원공사 때 다른 시설 다 철거되는데 겨우 살아남았죠. 생존 건물인 셈이에요. 기관에서는 그런 면을 꼭 써달라고 하더라고요.”
“살아남은 거요?”
“네, 그리고 실측이 진행 중인데 지하 공간이 발견됐거든요. 좀 흥미로워졌어요.”

P. 156~157
나는 좋은 부분을 오려내 남기지 못하고 어떤 시절을 통째로 버리고 싶어하는 마음들을 이해한다. 소중한 시절을 불행에게 다 내주고 그 시절을 연상시키는 그리움과 죽도록 싸워야 하는 사람들을.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그 무거운 무력감과 섀도복싱해야 하는 이들을. 마치 생명이 있는 어떤 것의 목을 조르듯 내 마음이라는 것, 사랑이라는 것을 천천히 죽이며 진행되는 상실을, 걔를 사랑하고 이별하는 과정이 가르쳐주었다.

P. 179
아이 때는 다리가 있으나 없으나 어디를 갈 수 없는 건 매한가지다. 어른이라는 벽이 둘러싸고 있으니까. 우리 곁에 균열이 나지 않은 어른은 없었다. 그러니 불안하지 않은 아이도 없었다. 지금 목격하는 저 삶의 풍랑이 내 것이 될까 긴장했고 그러면서도 결국 양육자들이 이기지 못해 사라질까봐 두려웠다. 마구 달려서 자기 마음에서 눈 돌리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순간이 아닐까. 나는 아마 산아도 그래서 자전거를 타고 달려오지 않았을까 짐작했다.

P. 190
만날 수 있을까?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만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미 정리된 과거의 방에 누군가를 다시 들이기 싫었다.
하지만 만나고 싶은가?하고 물었을 때는 의외로 그렇다는 확실한 마음이 들었다. 만나고 싶었다. 낙원하숙 시절 얘기도 하고 기억 속 일들을 울지 않고 웃으며, 공유하는 추억을 펼쳐 남들처럼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리고 나서 집으로 돌아오면서는 이제 내가 그 일을 웃으며 이야기하네, 시간이 이렇게 지났네, 덤덤해하고 싶었다.

P. 209~210
장과장 말처럼 그냥 지나가도 좋을 것이다. 어차피 사람들이 원하는 건 사면이 유리로 된 온실의 아름다움이지 그 아래 무엇이 있었는가가 아닐 테니까. 땅 밑은 수리와 복원의 대상도 아니니까. 하지만 질서에는 어긋날 것이다. 그렇게 묻은 상태로는 전체를 알기란 어려울 것이다. 공동과 침하가 계속되겠지. 개인적 상처들이 그렇듯이. 그렇게 한쪽을 묻어버린다면 허술한 수리를 한 것이 아닐까.

P. 217
나는 리사를 망치고 싶었다. 구길 수 있다면 구기고 싶었고 얼릴 수 있다면 그대로 얼려버리고 싶었다. 그런 내 마음을 눈치챈 날 나는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강화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리사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렇게 생성되는 악의에서 나 자신을 구하기 위해 그래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게 내가 겨우 떠올릴 수 있는 살길이었다.

P. 267
산아는 왜 옛날이야기들은 이렇게 슬프게 끝나는지 모르겠다고, 역사책 읽을 때마다 해피엔드인 적이 없다고 말했다. 너무 옳은 말이라서 또다시 대답할 수가 없었다. 역사가 슬픈 건 죽은 이들 때문일 수도 있고, 늘 미완으로 남는 소망 때문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P. 403
˝아니란다, 영두야. 그건 인간의 시간과는 다른 시간들이 언제나 흐르고 있다는 얘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