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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를 허무는 사랑의 물질성: 천선란 『어떤 물질의 사랑』, 이 세상 모든 외계인에게 바치는 위로

책이랑 영화랑 2025. 7. 17. 09:00

책 표지

 

복잡다단한 현실 속에서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찾고 있던 제게, 천선란 작가의 첫 소설집 『어떤 물질의 사랑』은 한 줄기 빛이자, 뜨거운 위로였습니다. 치매를 앓는 어머니를 간병하며 글을 썼다는 작가의 배경처럼, 상실감과 외로움 속에서도 굳건히 나아가는 인물들의 모습은 비단 허구의 세계에만 머물지 않고 우리의 삶과 관계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요구합니다. 소설가 김초엽 작가의 말처럼, 천선란의 소설은 "먹먹한 물소리뿐인 바다 깊은 곳으로 가라앉는 것 같다"가도 "상실과 고통을 받아들여야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새로운 세계로 우리를 끌어들이"며 "아름답고 서정적"인 감정의 파도를 선사합니다. "선한 마음을 끝까지 믿는 세계"를 지향한다는 작가의 말처럼, 이 소설집은 인간과 비인간, 다양한 형태의 관계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의 본질을 끈질기게 탐구하며, 독자로 하여금 세상의 모든 '외계인'들에게 뜨뜻미지근한 위로를 건넵니다. 왜 이 책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지, 저와 함께 그 매력 속으로 빠져들어 보시죠.


1. 규정되지 않는 사랑의 물질성: 경계를 허무는 이야기들

사랑의 다양성

 

『어떤 물질의 사랑』을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테마는 바로 '사랑'과 '관계', 그리고 '규정되지 않는 존재의 가치'입니다. 표제작 <어떤 물질의 사랑>은 이 모든 것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으로, 저에게 가장 큰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주인공 '라현'은 배꼽이 없고 좋아하는 상대의 성별에 따라 신체의 생식기가 변화하는 독특한 존재입니다. 작가는 이러한 설정을 통해 이성애 중심적, 성별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전복하고, 사회가 정한 '정상성'이라는 편견에 정면으로 질문을 던집니다.

라현의 엄마가 무덤덤하게 던지는 “‘원래 그런’ 건 없어. 당연한 것도 없고”라는 메시지는 단단한 울림이 되어 마음속에 새겨졌습니다. 이는 단순히 라현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정상이라고 착각하는 것들에 억지로 하나를 맞췄다가 너를 영영 잃을 것 같았어"라는 엄마의 말은, 남들과 다른 자신을 부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바로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의 중요한 전제 조건임을 깨닫게 했습니다. 수많은 '정상'의 틀에 갇혀 살아온 우리 모두에게 던지는 위로이자 해방 선언과 같았습니다. 이 대사는 독자들이 "어떻게 여자가 여자를 사랑할 수 있어? 그럴 수도 있지. 어떻게 타고난 성별과 젠더가 다를 수 있어? 그럴 수도 있지"와 같이 '그럴 수도 있지'라는 태도를 통해 상상력을 확장할 수 있도록 이끄는 작가의 철학을 담고 있기도 합니다.

"이 지구에 같은 인간은 없어요. 모두가 다 서로에게 외계인인 걸"

 

외계인 '라오'와의 만남은 이 주제를 더욱 확장합니다. 라오는 라현에게 "이 지구에 같은 인간은 없어요. 모두가 다 서로에게 외계인인 걸"이라고 말하며 라현의 외로움을 감싸 안습니다. 이 역설적인 시각은 우리 모두가 타인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존재, 즉 '외계인'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합니다. 이로써 관계에서 오는 외로움을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고, 규정되지 않는 사랑의 다양한 형태를 긍정하며 독자들에게 깊은 성찰과 따뜻한 위로를 선사합니다. 저 또한 타인에게 '온전한 나'로 이해받고 싶은 욕구와 동시에, 타인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나'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는 순간을 경험했습니다.

김창규 평론가의 언급처럼, <그림자놀이>, <레시>, 그리고 표제작 <어떤 물질의 사랑>은 숫자 '2'의 세계, 즉 "관계와 외면, 이해와 오해"를 다루는 "구조적인 다중우주"를 형성합니다. <그림자놀이>에서는 단절된 관계 속에서 벌어지는 소통의 부재와 오해의 씁쓸함을, <레시>에서는 상실과 애도를 통해 비로소 드러나는 관계의 본질을 섬세하게 그려냅니다. 작가는 <레시>를 환경문제를 테마로 시작했다고 밝히며, 인간이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잃어버렸는지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이처럼 작가는 다양한 서사를 통해 관계의 복잡성과 그 속에서 발생하는 고통,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를 통해 얻는 위로와 희망을 다층적으로 보여줍니다.


2. SF적 상상력으로 질문하는 존재와 사회의 민낯

인간과 로봇의 공존

 

천선란 작가는 SF라는 장르적 틀을 빌려 현실의 문제를 날카롭게 꿰뚫고, 존재의 본질적인 질문을 던집니다. 이는 SF가 단순한 공상이 아닌, "현실과 미래, 인간의 감정을 탐구하는 중요한 도구"라는 작가의 신념과 일치합니다.

단편 <마지막 드라이브>는 인간 아닌 존재의 사랑과 희생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집니다. 로봇 '더미'가 사랑하는 '델리'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은, 단순히 입력된 값에 따라 행동하는 기계가 아니라 스스로의 '행위'를 통해 사랑을 실현하는 존재임을 보여주며 깊은 감동을 안겨줍니다. "더미는 자신이 델리를 행복하게 하기 위한 존재라고 생각했지만, 결국 델리의 행복은 더미에게 달려있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다"는 구절은, 맹목적인 사랑의 한계와 진정한 행복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합니다. 이 작품은 인간 중심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비인간 존재에게도 감정과 사랑, 그리고 희생의 서사를 부여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새로운 윤리적, 존재론적 질문을 던집니다.

 

또한 작가는 사회 비판적 시각을 놓치지 않습니다. <두하나>는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차별이 만연한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배경으로 합니다. 이 작품은 작가가 2019년 낙태죄 폐지 운동의 시기에 썼다고 밝힌 것처럼, 사회적 억압 속에서도 주인공들이 좌절하지 않고 서로에게 손을 내밀며 연대하는 모습을 통해, 절망 속에서도 피어나는 희망과 강인한 생명력을 보여줍니다. 이는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기꺼이 서로를 보듬고 함께 나아가려는 인간 본연의 의지를 보여주며 묵직한 울림을 전합니다. <검은색의 가면을 쓴 새>에서는 자본주의 사회의 '기괴함'과 돈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의 현실을 비판적으로 그려냅니다. 돈이 목적이 되어버린 세상에서, 인간성이 어떻게 소외되고 착취당하는지를 보여주며 독자들에게 현실을 직시하게 만듭니다. 이러한 작품들은 SF적 상상력이라는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현재 우리가 직면한 사회 문제들과 놀랍도록 맞닿아 있습니다.

심지어 <사막으로>는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에 가깝다고 알려져 있어, 소설 속 외로움과 고독, 그럼에도 굳건히 나아가는 의지가 더욱 깊게 다가옵니다. 이처럼 작가는 자신의 내밀한 감정("분함과 억울함, 쓸쓸함과 서러움, 외로움과 기괴함")을 바탕으로 소설을 써 내려가며, 독자들이 현실을 새롭게 인식하고 삶의 의미를 되새기도록 이끕니다.


3. 천선란 작가 특유의 따뜻한 시선과 치유의 언어

천선란 작가(경향신문)

 

천선란 작가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은 그녀만의 독특하고 따뜻한 시선입니다. 그녀는 인물 중심의 서사를 통해 복잡한 감정의 결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끊임없는 퇴고를 통해 가장 적확한 언어를 찾아냅니다. 흥미롭게도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구구절절 설명하는 것이 예술가의 신비주의를 깨뜨린다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며, 각 단편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를 간략하게 설명하는 편이라고 밝힙니다. 이러한 소통 방식은 독자들이 작가의 의도를 좀 더 명확히 이해하고 작품에 깊이 몰입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SF라는 장르의 확장성을 십분 활용하면서도, 그 속에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과 사회의 부조리를 녹여내는 방식은 그녀만의 독보적인 강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비인간 존재, 소수자, 약자에게 보내는 깊은 애정과 연민은 독자들에게 큰 위로와 공감을 선사합니다. 그녀의 문체는 때로는 시적이고, 때로는 담담하지만, 늘 인물들의 내면을 섬세하게 파고들어 독자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작가는 이 소설집이 독자들에게 "뜨뜻미지근하게 남았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강렬한 충격이나 격렬한 감정보다는, 은은하게 오래도록 여운을 남기며 삶의 어떤 순간, 어떤 관계에서 이 책이 자연스럽게 떠오르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이 책을 읽으며 타인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외로움과 고독이 비단 나만의 것이 아니며,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외계인'일 수 있다는 역설적인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외로움 속에서 서로를 이해하고 연대하려는 작은 몸짓들이 모여 세상을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사랑이 '물질'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서로를 이해하고 아픔을 보듬는 '온기'와 같은 물질일 것입니다.


4. 벼랑 끝에서 다시 연결되다: 이 세상 모든 '외계인'을 위한 이야기

사랑의 빛

 

『어떤 물질의 사랑』은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에 질문을 던지고, 경계를 허물고, 끊임없이 확장하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습니다. 사랑의 형태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를 넘어 생명의 존엄성을 이야기하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연대의 불씨를 지피는 이 책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복잡하고 때로는 냉혹한 현실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용기를 줍니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이 지구라는 행성에서 살아가고 있는 '외계인'일지도 모릅니다. 서로를 완벽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 손을 내밀고, 아픔을 보듬고, 함께 살아가려 노력하는 존재들 말입니다. 천선란 작가는 바로 그런 '외계인'들에게 진정한 위로와 공감을 선사합니다. 이 책은 '사랑'이라는 보편적인 감정을 SF라는 독특한 프리즘을 통해 새롭게 해체하고 재구성하며,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진정으로 살아가야 할 '인간적인' 삶의 방식을 제안합니다.

복잡한 관계 속에서 외로움을 느끼는 분, 세상의 불합리함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을 찾고 싶은 분, 혹은 SF 장르를 통해 깊이 있는 인간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싶은 분이라면, 천선란 작가의 『어떤 물질의 사랑』을 강력히 추천합니다. 이 책은 당신의 마음에 따뜻한 온기를 남기고,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야를 열어줄 것입니다.

 

너는 봄날의 햇살 같아! 너는 밝고 따뜻하고 착하고 다정한 사람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