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때로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이 너무 비현실적으로 보여서, 내가 이 세계에 존재한다는 것이 의심스러울 때가 있었다."
- 상실의 시대 중에서
첫 만남: 비 내리는 도쿄와 녹음이 우거진 대학 캠퍼스
우연히 접한 일본 여행 사진 한 장이 내게 하루키와의 첫 만남을 선사했다. 비 내리는 도쿄의 거리, 누군가의 손에 들린 책 표지 - '노르웨이의 숲'. 그때만 해도 이 책이 한국에서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일본 문화 개방 이전, 하루키의 작품은 '세계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다가왔고, 출판사는 원제보다 더 마케팅적이고 상징적인 제목을 선택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이 오히려 이 소설의 본질을 더 정확히 포착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줄거리: 상실과 성장의 경계를 걷다
'상실의 시대'는 주인공 와타나베 도오루가 비행기에서 비틀즈의 'Norwegian Wood'를 들으며 과거를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대학생이던 시절, 그의 가장 친한 친구 기즈키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이후 와타나베는 기즈키의 연인이었던 나오코와 가까워지지만, 나오코는 깊은 정신적 상처로 요양원에 들어간다. 한편 대학에서 만난 활기 넘치는 미도리는 와타나베에게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야기는 삶과 죽음의 경계, 상처받은 영혼들의 구원, 그리고 과거의 상실감에서 벗어나 미래로 나아가는 성장 과정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결국 나오코마저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고, 와타나베는 죽음의 세계와 삶의 세계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만 한다.
문체: CSS(쿨하고, 심플하며, 센서티브)
하루키의 문체는 첫 문장부터 매혹적이다. 쿨하고(Cool), 심플하며(Simple), 감각적인(Sensitive) 문장들은 마치 재즈 연주처럼 리듬감 있게 흘러간다. 과장 없이 담담하게 서술하는 그의 방식은 오히려 더 큰 여운을 남긴다.
"나는 37살이 되고, 비행기 안에 앉아 있었다. 그 작은 비행기가 착륙태세를 취하기 위해 고도를 낮추면서 두꺼운 구름층을 뚫고 함부르크 평원 위로 나왔을 때, 기내에서 나오고 있던 BGM이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이었다."
이 문장으로 시작되는 소설은 곧바로 독자를 와타나베의 내면으로 인도한다. 기교를 부리지 않는 듯하면서도 세밀한 관찰력과 촘촘한 구조가 돋보인다. 여러 번 읽을수록 새로운 의미가 발견되는 이유가 바로 이 탄탄한 구조에 있다.
- "죽음은 삶의 대극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의 한 부분으로서 죽음은 존재한다."
경계에 선 인물들
'상실의 시대'의 매력은 인물들이 모두 삶과 죽음의 경계,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서 있다는 점이다. 특히 나오코와 미도리는 상반된 두 세계를 상징한다.
나오코는 과거, 죽음, 상실, 정지된 시간을 대표한다. 그녀가 머무는 아미타케 요양원은 마치 현실과 분리된 별세계와 같다. 반면 미도리는 현재, 삶, 가능성, 흐르는 시간을 상징한다. 그녀의 직설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캐릭터는 나오코의 침묵과 고독과 대비된다.
와타나베는 이 두 여성 사이에서, 즉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방황한다. 그의 선택은 결국 자신의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부재하는 아버지와 '벽'의 상징성
하루키 작품에서 반복되는 두 가지 상징이 이 소설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진다. 첫째는 '부재하는 아버지'다. 작품 속 아버지들은 대부분 무력하거나 존재감이 없다. 이는 질서, 권위, 이념의 상실을 의미한다. 두 번째는 '벽'이다. 레이코 선생이 말하는 '벽'은 시스템, 사회, 규범을 상징하며, 인간을 보호하는 동시에 억압하는 이중성을 지닌다.
"세상에는 높고 단단한 벽이 있고, 그 너머에는 달걀이 있어. 벽이 아무리 올바르고 달걀이 아무리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나는 달걀 편에 서겠어."
이 구절은 하루키의 세계관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언제나 시스템보다 개인의 편에 선다. 그리고 우리에게 어떤 '정답'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함께 고민하고, 방황하며, 때로는 위로받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할 뿐이다.
90년대 한국 사회와의 공명
내가 이 소설을 처음 읽은 것은 대학생 시절이었다. 당시 한국은 급격한 근대화를 거쳐 물질적 풍요를 이룬 '신세대'가 등장하던 시기였다. 이념이 사라진 시대, 우리는 풍요로웠지만 동시에 공허했다. 목표를 상실한 채 방황하는 와타나베의 모습은 그래서 더 친숙하게 다가왔다.
특히 인상적인 점은 하루키의 소설이 마치 내 경험인 양 느껴진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겪지 않은 일들이 마치 내 기억의 일부처럼 형성되는 기이한 경험. 이것이 바로 하루키 문학의 마력이다. 그의 소설이 국경을 초월해 보편적인 공감대를 형성하는 이유다.
세 번의 독서, 세 가지 다른 경험
'상실의 시대'는 내 인생에서 세 번 읽은 몇 안 되는 책 중 하나다. 20대 초반에 처음 읽었을 때는 주인공의 방황과 사랑에 깊이 공감했다. 30대 중반에 다시 읽었을 때는 레이코 선생과 나오코의 상처에 더 주목하게 되었다. 그리고 최근 다시 펼쳤을 때는 이 모든 인물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상실'과 싸우고 있음을 발견했다.
특히 인상 깊었던 장면은 와타나베가 일본 북부를 홀로 여행하는 부분이다. 그는 마치 자신만의 순례길을 걷듯 육체적 고통을 통해 정신적 상처를 치유하려 한다. 나 역시 인생의 어려운 시기마다 종종 혼자 여행을 떠났고, 그때마다 와타나베의 여정이 떠올랐다.
- "나는 걸었다. 생각할 것도 없었다. 그저 앞으로 나아가면 될 뿐이었다."
하루키에 대한 비판과 옹호
물론 하루키의 소설이 모두에게 환영받는 것은 아니다. 일본 내에서도 그의 작품이 지나치게 통속적이고 외설적이며, 사회성이 결여되었다는 비판이 있다. 또한 개연성 부족, 갑작스러운 등장인물의 소멸 등 기법적인 측면에서도 지적을 받는다.
하지만 내게 하루키의 소설은 단순한 오락물이 아닌, 현대인의 실존적 고립과 상실을 다루는 진지한 문학이다. 그가 노벨상 후보에 오르는 이유도 바로 이 보편적 공감대와 독특한 문학적 성취 때문일 것이다.
결론: 우리 모두의 '상실의 시대'
결국 '상실의 시대'는 단순히 1960-70년대 일본 젊은이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급격한 변화 속에서 방향을 잃은 모든 영혼들의 이야기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각자의 '상실'과 마주하고 있다. 코로나19 이후의 세계, 디지털 시대의 고립,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 우리는 여전히 와타나베처럼 방황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루키의 소설이 여전히 읽히는 이유는 그가 '답'을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우리와 함께 걸으며, 가끔은 고개를 끄덕이고, 때로는 어깨를 토닥여줄 뿐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하다.
비틀즈의 노래 'Norwegian Wood'처럼, 이 소설은 우리의 상실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매개체다. 하지만 동시에 그 상실을 딛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도 준다. 와타나베가 마지막에 미도리에게 전화를 걸어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라고 물었을 때, 그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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