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 장르를 초월한 작가의 귀환
봉준호 감독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기생충>(2019) 이후 6년 만에 선보이는 SF 서사시 <미키 17>는 단순한 장르물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에드워드 애슈턴의 소설 《미키 7》을 원작으로 하되, 봉 감독 특유의 사회적 메시지와 인문학적 성찰을 접목시킨 이 작품은 할리우드의 규모와 아시아 작가주의 영화의 깊이를 결합한 현대 영화 미학의 정점을 보여준다.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의 양극화된 반응은 이 작품이 단순한 엔터테인먼트가 아닌, 관객에게 직접적인 질문을 던지는 도발적인 텍스트임을 방증한다.
1. 존재론적 질문을 담은 SF의 새로운 지평
<미키 17>는 표면적으로는 우주 식민지 개척이라는 전형적 SF 설정을 차용하지만, 그 내면에는 철학적 질문들이 층층이 쌓여있다. '미키 반스'라는 소모품 취급받는 복제인간(익스펜더블)이 17번째 육체로 '프린팅'되는 설정은 단순한 SF 장치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연속성과 정체성에 관한 본질적 질문을 던진다.
로버트 패틴슨이 연기하는 미키는 노동계급의 소외와 인간 존재의 찰나성을 동시에 상징한다. 특히 죽음과 재생을 반복하는 미키의 실존적 고뇌는 페르소나의 분열과 통합이라는 베르그만적 주제를 SF 장르에 효과적으로 접목시켰다. 패틴슨이 같은 인물의 다른 버전(미키 17과 예기치 않게 등장한 미키 18)을 연기하며 보여주는 미묘한 연기 변주는 이 영화의 가장 탁월한 성취 중 하나다.
영화학적 관점에서 주목할 점은 봉준호 감독이 CG와 실제 세트를 절묘하게 조화시키는 방식이다. 니플하임 행성의 황량한 풍경은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1972)를 연상시키는 철학적 공간으로 재해석되었으며, 프랑스 영화평론가 앙드레 바쟁이 말한 '이미지의 존재론'을 현대적으로 갱신한다.
2. 영화적 텍스트의 다층적 해독
2.1. 복제와 정체성의 변증법
봉준호 감독은 미키의 복제 과정에 의도적인 '오류'와 '불완전성'을 설정함으로써 기술결정론에 반기를 든다. 이는 단순한 플롯 장치가 아닌, 디지털 시대 인간 정체성의 파편화와 그 재구성 가능성을 암시한다. 미키 17이라는 제목이 상징하는 바는 16번의 죽음과 재생을 거친 후 비로소 자아를 찾는 과정—즉, 실존주의적 관점에서의 '본질에 앞서는 실존'이라는 철학적 명제의 영화적 구현이다.
특히 미키 17과 18의 대면 장면은 자크 라캉의 '거울 단계' 이론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 탁월한 시퀀스다. 동일한 기억을 공유하지만 미세하게 다른 두 존재의 긴장과 연대는 정체성이 고정된 것이 아닌 유동적 구성물임을 암시한다.
2.2. 아가페와 에로스의 공존
봉준호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최초로 시도된 본격적 로맨스 서사는 단순한 장르적 확장이 아닌, 그의 사회적 메시지를 더욱 입체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다. 나오미 애키가 연기하는 나샤는 전형적인 로맨스 영화의 여성상을 탈피한다. 그녀는 단순한 '사랑의 대상'이 아닌, 식민지 개척 시스템 내에서의 자신만의 생존 전략을 구축한 주체적 인물로서, 미키의 생존과 자아 회복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나샤와 미키의 관계는 고전적인 '낭만적 사랑'의 코드를 차용하되, 극한 상황에서의 상호의존성과 생존을 위한 연대라는 보다 복잡한 층위를 내포한다. 이는 봉준호 감독이 <괴물>(2006)과 <설국열차>(2013)에서 보여준 가족 서사의 자연스러운 확장으로 해석할 수 있다.
2.3. 자본주의 비판의 새로운 은유
'익스펜더블'이라는 용어 선택은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노동자의 대체 가능성을 직접적으로 암시한다. 원작에서 스포츠 도박 빚을 진 설정을 마카롱 가게 실패로 수정한 것은 단순한 문화적 맥락화가 아닌,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자영업자의 취약성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적 각색이다.
특히 주목할 점은 복제 기술이 가진 양면성이다. 생명연장과 신체적 한계 극복이라는 유토피아적 가능성과 함께, 이 기술이 새로운 계급 구조를 공고히 하는 디스토피아적 실현 양상을 동시에 보여준다. 이는 기술의 발전이 필연적으로 사회적 진보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봉준호 감독의 일관된 시각을 반영한다.
새롭게 창조된 독재자 부부 케네스 마셜과 일파 마셜은 권력과 자본의 결합이 낳는 기괴함을 그로테스크한 방식으로 형상화한다. 특히 일파 마셜의 소스에 대한 집착은 프로이트적 관점에서 권력자의 억압된 욕망이 왜곡된 형태로 표출되는 방식을 보여주는 심리적 장치다.
2.4. 포스트-휴머니즘적 시각
<미키 17>에서 '크리퍼'라 불리는 외계 생명체들은 단순한 적대적 타자가 아닌, 인간보다 더 강한 연대의식을 보여주는 대안적 존재로 그려진다. 이들과 미키의 소통 시도는 휴머니즘의 한계를 넘어서는 포스트-휴머니즘적 비전을 제시한다.
특히 영화의 클라이맥스에 등장하는 광활한 벌판에서의 크리퍼들의 '군무'는 단순한 시각적 스펙터클을 넘어, 다른 방식의 공동체 가능성을 암시하는 봉준호 감독의 유토피아적 비전이 담긴 장면이다. 이는 <옥자>(2017)에서 보여준 인간과 비인간 존재 간의 관계에 대한 성찰을 한 단계 발전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3. 원작과의 변증법적 대화
<미키 17>은 원작 소설 《미키 7》과의 '창조적 배신'을 통해 완전히 새로운 작품으로 재탄생했다. 에드워드 애슈턴의 소설이 제공한 기본 설정을 차용하되, 봉준호 감독은 자신의 영화적 세계관과 철학적 질문들을 접목시켜 원작과 차별화된 독자적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특히 원작에 없던 독재자 부부 캐릭터의 창조는 봉준호 감독이 항상 천착해온 권력의 기괴함과 억압의 정치학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한 선택이다. 또한 배경 설정을 2054년의 근미래로 변경한 것은 관객들에게 이 서사가 공상과학이 아닌, 현재의 사회·경제적 구조가 필연적으로 나아갈 수 있는 미래임을 암시하는 전략적 결정이다.
4. 영화 언어의 혁신
봉준호 감독은 <미키 17>에서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장르 혼합과 톤 변주를 더욱 과감하게 실험한다. 특히 죽음과 재생 장면에서 보여주는 블랙 코미디적 요소는 이 영화의 무거운 주제의식을 관객들에게 소화 가능한 형태로 전달하는 효과적인 장치다.
촬영감독 홍경표와의 지속적인 협업을 통해 봉준호 감독은 SF 장르 특유의 차가운 미학과 인물 중심의 정서적 따뜻함을 절묘하게 조화시킨다. 특히 닫힌 공간과 열린 공간의 대비, 인공적 색감과 자연적 색감의 충돌은 인간과 기술, 자연과 문명이라는 이항대립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한다.
사운드 디자인 역시 주목할 만하다. 인간 대화와 기계음, 그리고 크리퍼들의 독특한 소리가 만들어내는 음향적 층위는 영화의 주제의식을 청각적으로 보강한다. 봉준호 감독이 언급한 "3차원적 감각 경험"은 단순한 스펙터클이 아닌, 관객의 모든 감각을 통해 영화의 메시지를 체화시키려는 시도로 해석할 수 있다.
5. 엇갈리는 반응의 의미론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의 양극화된 반응은 <미키 17>가 관객의 기대지평을 의도적으로 배반하는 작품임을 방증한다. 봉준호 감독은 SF 장르의 외피를 빌려 인간 존재의 본질과 사회구조의 모순이라는 불편한 질문들을 던진다. 이러한 철학적·정치적 질문들은 단순한 오락적 관람을 기대한 관객들에게는 불편함을 줄 수 있으나, 이는 오히려 영화의 성공적인 도발로 볼 수 있다.
미국 '인디와이어'와 영국 BBC의 상반된 평가는 <미키 17>의 다층적 텍스트성을 증명한다. 이는 단일한 해석을 거부하는 열린 텍스트로서의 <미키 17>의 가치를 오히려 부각시킨다. 봉준호 감독이 언급한 "개봉 후 차분히 살펴보겠다"는 입장은 작품과 관객 사이의 지속적인 대화 가능성을 열어두는 성숙한 작가적 태도를 보여준다.
결론: 작가주의 SF의 새로운 지평
<미키 17>는 봉준호 감독이 할리우드 시스템 내에서도 자신의 작가적 비전을 타협 없이 관철시킨 야심찬 프로젝트다. 이 영화는 SF 장르의 관습을 차용하되, 그것을 철학적·정치적 질문의 매개체로 승화시킴으로써 장르 영화와 작가주의 영화 사이의 인위적 경계를 허문다.
인간 존재의 정체성, 기술의 양면성, 자본주의의 모순, 그리고 사랑과 연대의 가치를 복합적으로 탐구하는 <미키 17>는 단순한 오락물이 아닌,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철학적·미학적 가능성을 최대한 활용한 현대 영화 예술의 정점이다. 봉준호 감독은 관객에게 쉬운 답변 대신 더 많은 질문을 남기는 진정한 작가로서, 또 한 번 자신의 경계를 확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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