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제 마음속에 깊은 여운을 남긴 클레어 키건 작가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2022년 부커상 최종 후보작이자 역대 후보작 중 가장 짧은 소설로도 알려진 이 책은, 그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잊히지 않는 강렬한 메시지를 던져주었습니다.
1. 아일랜드의 어두운 그림자, 막달레나 세탁소
이 소설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 배경이 되는 1985년 아일랜드의 한 작은 마을, 뉴로스와 '막달레나 세탁소'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막달레나 세탁소'는 18세기부터 20세기 말까지 아일랜드에서 가톨릭 수녀원에 의해 운영되었던 시설입니다. 이곳은 '타락한 여성'들을 교화한다는 명목 아래 강제노역, 학대, 인권 유린이 자행되던 곳이었죠. 결혼하지 않고 아이를 낳았거나, 성매매에 종사했거나, 사회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여겨진 여성들이 수용되었고, 이러한 인권 유린은 무려 1922년부터 1996년까지 수십 년간 지속되었습니다.
"1922년부터 1996년까지, 아일랜드 막달레나 수녀원에서는 적게는 1만명, 정당하게 추산하자면 3만명에 이르는 젊은 여성들이 감금당한 채 강제노역을 하며 학대당했다. ‘타락하고 방탕한 여자들을 교화한다’는 미명하에서였다." - 한겨레
이러한 시설들은 가톨릭교회가 아일랜드 정부의 은밀한 자금 지원 아래 운영되었으며, 관련 자료 은폐로 정확한 피해자 수 파악조차 어렵다고 합니다. 조사 대상 18개 시설에서만 9천 명이 사망했다는 보고서도 있을 정도이니, 그 비극의 깊이를 짐작하기 어렵습니다. 소설은 바로 이러한 아일랜드의 어둡고 비극적인 역사를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책을 읽는 내내, 저도 모르게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런 일이 실제라고?' 하는 충격과 함께 인간의 존엄성이 얼마나 쉽게 짓밟힐 수 있는지에 대한 깊은 사색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2. 평범한 소시민, 빌 펄롱의 양심
소설의 주인공 빌 펄롱은 석탄 배달을 하며 다섯 명의 딸을 부양하는 성실한 가장입니다. 부유하지는 않지만 가족과 함께 따뜻하고 화목한 삶을 꾸려나가고 있죠. 그런데 그는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 사회적 차별을 겪었지만, 어머니의 고용주였던 미시즈 윌슨의 따뜻한 보살핌 덕분에 건강한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개인적인 경험 때문인지 그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고 지나치지 못하는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날, 펄롱은 수녀원에 석탄을 배달하러 갔다가 석탄 창고에 갇혀 있는 젊은 여성 세라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충격적인 현실 앞에서 깊은 내적 갈등을 겪게 되죠. 수녀원의 절대적인 권위와 자신의 딸들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다는 암묵적인 경고 앞에서 침묵할 것인가, 아니면 용기를 내어 행동할 것인가. 그의 고뇌는 페이지마다 절절히 느껴졌습니다.
"이게 다 무엇 때문일까 펄롱은 생각했다 일 그리고 끝없는 걱정 캄캄할 때 일어나서 작업장으로 출근해 날마다 하루 종일 배달하고 캄캄할 때 집에 돌아와서 식탁에 앉아 저녁을 먹고 잠이 들었다가 어둠속에서 잠에서 깨어 똑같은 것을 또다시 마주하는 것 아무것도 달라지지도 바뀌지도 새로워지지도 않는 걸까"
펄롱의 아내와 주변 사람들은 현실적인 이유를 들며 그에게 침묵을 종용합니다. "걔네들은 우리 애들이 아니야 계속 버티고 조용히 엎드려 지내면서 사람들과 척지지 않고 살아야지 함부로 움직였다가는 모든 걸 다 잃는 일이 너무나 쉽게 일어난다". 이 대목에서 저는 '나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질문을 수없이 던졌습니다. 가족의 안위와 자신의 평온한 삶을 위협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 과연 윤리적 선택을 할 수 있을까? 펄롱은 자신이 그 상황을 보고만 있었고, 도움을 주지 못했으며, 심지어 입막음의 의미로 돈을 받았다는 사실에 죄책감을 느낍니다. 그는 결국 자신의 양심이 이끄는 대로 행동하기로 결심합니다.
3. '이처럼 사소한 것들'이 만드는 위대한 변화
소설은 거대한 부조리 앞에서 평범한 개인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선택의 의미를 깊이 탐구합니다. 펄롱은 자신의 안전과 가족의 안녕을 위협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윤리적인 결단을 내리고 세라를 구출합니다. 그는 세라를 데리고 마을을 걸으며 주변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외면 속에서도 이전에 느껴보지 못한 가벼움과 기쁨, 그리고 당당함을 느낍니다.
"아이를 데리고 걸으면서 펄롱은 얼마나 몸이 가볍고 당당한 느낌이 던지 가슴속에 새롭고 새삼스럽고 뭔지 모를 기쁨이 솟았다"
그의 행동은 자신이 미시즈 윌슨에게서 받았던 친절과 보살핌을 되새기며, 타인을 돕는 것이 삶의 의미를 부여한다는 깨달음에서 비롯됩니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은 펄롱의 용기 있는 행동을 통해 '작은 것들', 즉 일상 속의 사소하지만 필요한 친절, 연민, 그리고 인간적인 선량함이 얼마나 위대한 힘을 가질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클레어 키건 작가는 "예배당에서 무릎 절을 하거나 상점에서 거스름을 받으며 고맙다고 말하는 일" 같은 것들이 '사소하지만 필요한 일'이라고 썼습니다. 이러한 '사소한 것들'이 모여 한 사람의 삶을 이루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메시지에 저는 깊이 공감했습니다. 우리 주변의 작은 관심과 행동들이 결코 사소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대목이었습니다.
4. 클레어 키건의 섬세한 문장과 여운
클레어 키건 작가는 간결하고 절제된 문체로 인간의 복잡한 감정과 사회적 문제를 섬세하게 묘사하는 데 탁월한 작가로 평가받습니다. 24년간 단 4권의 책만을 출간했음에도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했으며, 그녀의 작품은 짧지만 깊은 울림을 선사합니다. "놀랍게도 키건은 화를 내거나 설교하지 않으면서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평처럼, 『이처럼 사소한 것들』 또한 짧은 분량 안에 상징과 압축을 통해 많은 질문을 던지며 독자들에게 깊은 성찰을 유도합니다.
소설은 펄롱이 세라를 집으로 데려오는 장면으로 끝이 나며,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열린 결말은 독자들에게 긴 여운을 남기며, 펄롱의 용기 있는 행동 이후에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상상하게 만듭니다. 결말은 단순히 사건 해결을 넘어, 펄롱이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동함으로써 얻는 내면의 평화와 자긍심을 강조합니다.
"타인의 손을 잡음으로써 삶의 의미를 깨달은 작은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자긍심이 그의 얼굴에 떠오른다. 이처럼 사소한 것들과 더불어." - 한겨레
이는 또한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부조리와 불의 앞에서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선택이 가져올 파장과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집니다.
맺음말
『이처럼 사소한 것들』은 아일랜드의 비극적인 역사를 배경으로 한 개인의 도덕적 용기와 인간적인 선량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거대한 악과 침묵의 문화 속에서도 자신의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주인공을 통해 독자들은 깊은 공감과 성찰을 경험하게 되며, 일상 속 '사소한 것들'의 가치와 타인을 향한 연민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이 책은 짧지만 묵직한 돌멩이처럼 마음에 큰 파동을 일으켰습니다. 불의를 목격했을 때 외면하지 않는 용기, 그리고 나 자신과 가족의 안녕을 넘어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손 내밀 수 있는 인간적인 선량함이 얼마나 큰 가치를 지니는지 곱씹게 하는 작품이었습니다. 저는 이 책을 읽고 난 후, 일상 속 작은 친절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이 책을 통해 깊은 감동과 함께 성찰의 시간을 가져보시길 강력히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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